11월의 과학사: NO, 벨이 되어버린 노벨상

 1967년 11월 28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진행 중이던 학생 조슬린 벨은 산처럼 쌓여있는 데이터의 숲 사이에서 이상한 흔적을 발견한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이 신호는 현대 천문학의 새로운 이정표로 자리 잡았다. 최초로 펄사(pulsar). 중성자별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대단한 발견은 몇 년 뒤 전혀 다른 의미의 논란거리를 낳고 말았다. 1974년 노벨상 수상자에는 그녀의 지도교수였던 엔써니 휴이시와 당시 전파 천문학의 창시자나 다름없던 마틴 라일만 존재했다. 정작 펄사를 발견해 낸 그녀의 이름은 그 자리에 없었다.

대학원생이던 조슬린 벨의 모습


 1930년대 초반, 무선 통신 기술이 개발되면서 기술자들의 목표 중의 하나는 자연에서 나오는 전파 신호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 신호를 분석하고 제거해야 조금 더 질 좋은 전파 통신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 연구를 진행하던 벨 연구소의 칼 잰스키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나타나는 신호를 찾게 된다. 이 신호는 최초로 ‘우주에서 날아온 전파’를 관측한 것이었다. 전파와 천문학의 첫 만남이 있었지만 정작 첫발을 뗀 잰스키는 벨 연구소 내의 다른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이 분야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전파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그의 이름인 잰스키를 사용하고 있다.) 그의 뒤를 이어 전파를 통한 천문학을 연구하려는 시도는 조금씩 있어왔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잰스키가 사용한 전파망원경의 복제품


 전파는 우주가 아니라 지상에서 전쟁을 위해 활용되고 있었다. 레이더를 통해 적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에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이 기술 개발에는 영국, 미국, 독일 할 것 없이 전쟁에 참여한 여러 나라가 모두 뛰어들었다. 영국은 TRE(Telecommunications Research Establishment)라고 불리는 통신 연구소를 운영했는데 이곳에서 무선 통신, 레이더뿐 아니라 적의 레이더 장치를 무력화시키는 전파 방해 장치까지 연구하고 있었다. 이 방해 장치 연구를 주도하고 있던 인물은 옥스퍼드를 졸업한 젊은 과학자 마틴 라일이었다. 그와 함께 일하던 인물들은 케임브리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이들 중 한 명이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원생이던 앤써니 휴이시였다.

마틴 라일(왼쪽)과 앤써니 휴이시(오른쪽)


 유럽 땅에 수많은 피를 뿌렸던 전쟁이 끝나고 각자의 연구실에서 전쟁에 참여했던 학자들도 자신들의 연구 분야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라일과 휴이시는 전파 분야가 본인들의 전공이었다. 그들에게 전쟁 기간 동안 보냈던 시간은 전파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 특히 라일이 제안한 간섭계 방식은 전파천문학이라는 분야를 일으켜 세웠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전파 신호가 약한 천체를 찾기 위해서는 전파 망원경 역시 크기가 커져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광학 망원경보다 전파 망원경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 그나마 쉽다고 해도 그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이 상황에서 작은 안테나 여럿을 연결시켜 사용하는 간섭계 방식은 다시 한번 기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 위치한 ALMA의 모습. 간섭계를 사용하여 여러 안테나를 같이 사용한다.


 이렇게 케임브리지에서 전파천문학이 태동하여 그 출발을 준비하고 있던 1940년대. 북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서 조슬린 벨이 태어났다. 그녀가 교육을 받던 1940~60년대는 당연하게도 남성과 여성의 교육 격차가 훨씬 심했다. 남학생들이 기술과 관련된 수업을 들을 때 여학생들은 십자수, 요리 같은 과목을 들어야 했다. (우리나라 역시 90년대까지 기술 과목은 남학생만, 가정 과목은 여학생만 듣도록 되어 있었다.) 벨과 가족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항의까지 하는 등 여러 활동을 통해 그녀가 물리 및 과학, 수학 학문을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물리학에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당연하게도 잘하는 것(물리학)에 더욱 흥미를 두었으며 건축가였던 아버지가 북아일랜드의 아르마 천문관 설계에 참여하면서 천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좋은 환경 속에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전파천문학’이라는 학문이 들어왔다. 사실 그녀가 그 많은 천문학의 분과 중 전파천문학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낮에 연구할 수 있는 천문학이라는 점이었다. (당시에 여성은 밤에 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에서는 독신 여성의 관측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남성과 여성이 짝을 이룬 관측 역시 불가능했다.)

 그녀의 관심사는 천문학이지만 정작 대학에서는 천문학이 아닌 물리학에 훨씬 더 집중했다. 대학 진학 전 당시 그녀는 마틴 라일과 함께 영국 전파천문학의 선구자였던 버나드 로벨(라일처럼 전쟁에서 레이더 개발에 참여한 전적이 있으며 개인 빚까지 지면서 전파 망원경을 만든 학자였다.)에게 편지까지 보내면서 조언을 구했다. 그 답변은 ‘물리학을 공부하라’ 였다. 글래스고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한 그녀는 또 한 번 외부의 시선과 충돌해야만 했다. 같은 여학생들은 물리학을 공부하는 그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남학생들 역시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학교에서 성적은 좋았지만 그녀는 외딴섬에 가까운 상태였다.

버나드 로벨의 모습. 그의 이름을 딴 로벨 전파망원경은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추적하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도 그녀는 전파천문학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버나드 로벨이 있는 맨체스터 대학의 조드럴뱅크 천문대에서 여름학기를 보내기도 하고 마틴 라일이 북아일랜드에서 진행하는 강연을 들으러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그녀의 다음 행선지는 라일이 있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였다. (사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아니고 합격한 곳이 케임브리지였다.) 그렇게 전파천문학자의 꿈을 안고 대학원생 생활을 시작한 그녀에게 처음 주어진 것은 거대한 빈 땅과 말뚝, 그리고 구리선이었다.

조슬린 벨과 그녀의 연구팀이 같이 만든 전파망원경의 모습


 벨을 대학원생으로 받은 사람은 라일의 제자이자 이제는 동료 교수가 된 앤써니 휴이시였다. 그리고 그의 당시 목표는 한참 전파천문학계의 화두가 되었던 퀘이사였다. 1963년 마르텐 슈미트가 3C273 천체의 정체를 밝혀낸 이후 이 퀘이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여러 방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휴이시는 태양풍이 전파 신호에 주는 영향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가 맨눈으로 별을 보면 깜빡이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는 가시광선이 지구 대기를 통과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그러나 전파로 천체를 봐도 깜빡거리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범인은 대기가 아니었다. 태양풍처럼 별에서 뿜어지는 입자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아주 작은 전파원인 퀘이사는 이 영향을 크게 받아 훨씬 다른 천체보다 더 많이 깜빡일 것으로 예상되었다. 휴이시는 이 현상을 이용해서 퀘이사를 발견할 생각이었다.

 이 방법을 실현하려면 새로운 전파망원경이 필요했다. 이 시기에 학교에 들어오게 된 벨에게 주어진 역할 역시 망원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1.6헥타르에 달하는 땅에 휴이시의 설계대로 말뚝을 박고 구리선을 묶으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매일 아침 공터에서 안테나를 만드는 작업을 2년 가까이 진행하는 연구팀 속에서 벨의 몸은 건강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2년의 안테나 작업, 6개월 간의 관측 운용. 그녀에게 졸업 논문 작성을 하도록 주어진 시간은 단 6개월이었다.

 망원경의 작동이 시작되고 하루 동안 나오는 데이터 종이의 길이만 30m 가까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기록되는 모든 신호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용접기에서 나오는 신호, 온도 조절기에서 나오는 신호, 해적 라디오 방송국의 전파 신호 심지어 경찰들의 무선 신호까지 방해를 했다. 이런 방해를 뚫고 퀘이사를 탐색하던 그녀에게 이상한 신호가 보였다. 그녀가 스크럽(scruff)라고 이름 붙인 이 신호는 퀘이사의 신호와는 형태가 조금 달랐다. 고작 0.6cm의 신호. 이 신호가 다른 전파 간섭이 아니라 생각한 그녀는 이전에 이러한 형태를 발견한 적이 있는지 떠올려야 했다.

1967년 8월에 기록된 신호.


 이전에 이런 신호가 있었는지 찾아보기 위해서는 수십 미터가 넘는 종이를 다시 뒤져야 했다. 결국 이전에도 비슷한 신호가 있었음을 확인한 그녀는 앞으로도 이런 신호가 나타나는지 확인해야 했다. 신호가 들어올 것으로 예측되는 시간에만 빠른 속도로 기계를 작동시켜 신호를 잡아내려 했다. 그 결과 의문의 신호가 포착되었다. 약 1.3초마다 반복되는 신호. 하지만 휴이시는 아직 확인 작업이 더 필요하다 느꼈다. 그녀가 사용한 망원경이 아닌 다른 망원경에서도 같은 신호가 잡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휴이시와 벨, 다른 두 학생이 망원경을 작동시켰다. 그런데… 예측했던 시간에 아무런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벨에게는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그녀의 망원경에서는 잡힌 신호가 다른 망원경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장치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했다. 관측실을 나서서 복도를 떠나는 순간까지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대학원 생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때 등 뒤에서 관측실에 남아있던 학생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신호가 나타난 것이었다. 약 5분의 계산 차이가 벨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끌고 올라왔다.

11월에 확인된 펄사 신호와 벨의 모습


 이 정체불명의 천체는 한 개만 발견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 LGM-1(Little Green Man-1)이라는 별명을 붙이면서 외계인의 신호가 아닌가 하는 가능성도 고려했지만 추가로 발견된 천체로 인해 그 확률은 사라졌다. 이처럼 새로운 발견은 언제나 학자들을 흥분시키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벨에게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녀의 졸업 논문인 퀘이사와 관련된 내용과 새로 발견된 천체를 동시에 연구하면서 진행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마침 벨은 그 시기에 약혼을 한 상태였다.)

휴이시와 벨의 논문. 첫번째 인물에 휴이시, 두번째 인물로 벨이 적혀있다.


 결국 새로 발견된 천체. 통칭 펄사라 불리는 존재를 알리는 논문의 1저자에는 지도교수였던 휴이시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와 연구팀은 펄사를 그동안 이론 상에서만 존재했던 중성자별이라고 생각했다. 논문 발표 이후 몇 달 만에 다른 천문학자들이 펄사의 신호를 찾기 위한 연구에 뛰어들었으며 68년 말에는 게성운 중심에 있는 펄사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처럼 활발하게 진행되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열었던 벨은 그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찬드라 우주망원경이 찍은 게성운. 펄사에서 X선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인다.


 68년. 학위를 받은 그녀는 케임브리지를 떠났다. 사우샘프턴 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시작한 그녀는 전리층 연구, 감마선 연구 등 펄사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소속을 바꿔야 했는데 그 이유는 남편의 직장 때문이었다. 공무원이었던 그녀의 남편은 근무지가 계속 변경되어야 했고 그로 인해 한 직장을 오래 이어가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1974년, 휴이시와 라일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수상 이유는 단순히 펄사의 발견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파천문학이라는 분야에 대한 기여를 생각하면 두 사람의 수상에 문제는 없었다. 다만 3명까지 받을 수 있는 노벨상에서 마지막 한 자리에 벨을 넣어주지 않았다는 점은 그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다. 케임브리지의 거장 천문학자였던 프레드 호일은 벨이 수상자에 없다는 것에 강력하게 분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벨이 천문학자를 꿈꾸게 만든 여러 책 중 호일의 저서도 있었다고 하니 이것 역시 재미있는 점이라 할 수 있겠다.) 노벨상이 아니라 노, 벨상이라는 조롱 섞인 문구까지 나오던 상황에서 벨은 오히려 담담하게 스승의 수상을 축하했다.

펄사의 개념도. 펄사는 중성자별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자전하면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이다. 그 규칙성이 매우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그녀는 개방대학(Open University)의 초창기부터 함께하며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리학을 가르쳤으며(개방대학은 입학에 특별한 자격 제한 없이 시간, 나이, 직업과 상관없이 수업을 들을 수 있는 대학교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개방대학이 바로 우리나라의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이다.) 노벨상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권위 있는 상을 휩쓸었다. 영국 기사작위, 애든버러 왕립 학회장을 거치며 여성 과학계의 거목이 되었으며 2018년 받은 브레이크스루상(Breakthrough Prize in Fundamental Physics)으로 얻게 된 300만 달러를 전액 기부하기도 하였다.

영국에 있는 개방대학교의 모습


 휴이시와 라일이 노벨상은 받고 시간이 흘러 1993년. 노벨위원회는 다시 한번 펄사에 손을 내밀었다. 이중 펄사를 발견한 공로로 조지프 테일러와 러셀 헐스가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특이한 점은 이 두 수상자의 관계가 이중 펄사 발견 당시 지도교수와 대학원생이었다는 점이었다. 테일러는 벨을 노벨상 시상식에 초청했다. 그녀의 기여를 인정해주기 위한 그의 노력이었다.

2018년, 브레이크스루상을 수상하는 벨의 모습.


 조슬린 벨은 여러 차례 강연 활동을 하면서 노벨상에 관한 질문을 받아왔다. 그때마다 그녀는 노벨상을 받지 못해서 오히려 운이 좋았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오히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학원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자신이 더욱 주목받았고 그로 인해 다양한 상을 받을 수 있어서 좋은 일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지금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노력을 이어 온 그녀의 발자취는 단순히 여성, 소수자라는 것을 뛰어넘어 모든 연구자들에게 귀감이 되어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밤늦은 시간까지 본인의 미래를 위해 열정을 불태우는 수많은 대학원생, 박사 후 연구원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들에게 조슬린 벨이 지녔던 끈기와 열정이 깃들어 훨씬 밝은 앞날이 펼쳐지기를 기원해 본다.


참고자료

  1. 막달레나 허기타이(한국여성과총 옮김). 2019. 내가 만난 여성 과학자들. 해나무
  2. David DeVorkin. 2000. Jocelyn Bell Burnell interviews. AIP
  3. 윤신영. 2018. “여성과 이민자 등 소수자를 위해 써달라” 34억 상금 전액 기부한 여성과학자. 동아사이언스
  4. 이광식. 2017. [아하! 우주] ‘펄서’ 인류의 우주관을 바꿨다 -조슬린 벨의 발견 50주년. NOW news
  5. 전혜리. 2006. “노벨상 못 받은 것은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The Science Times
  6. 이강환. 2016. 외계 지적생명체의 전파까지 찾아라. 한겨례
  7. 이충환. 2007. [과학이야기]중력파 검증하는 우주등대 ‘펄서’.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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